또 하나의 마지막

또 하나의 마지막이 지나갔다. 늘 그렇듯 이번 마지막도 기분이 묘하다. 어김없이 죽음에 대해서 생각했다. 삶이 피부에 닿도록 생생하고 따뜻하고 동시에 언제든 부서질 것만 같은 약한 풀처럼 느껴졌다. 끝에 다다랐다는 생각에 개운하기도 했지만 그것보다 더 섭섭함이 컸다. 정말 우연찮게 잡았던 기회가 세렌디피디(serendipity)가 될 줄이야. 이토록 좋은 사람들하고 함께 하면서, 성장하고, 실수하고, 배울 수 있었음에 참 많이 진심으로 감사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이 사람들과는 여기까지라니, 하는 진한 아쉬움이 남는다. 책상을 어지러이 덮고 있는 짐을 정리하면서 이제껏 하루에 12시간씩 보냈었던 이 자리를 떠난다는 생각에 설렘과 슬픔과 절망감이 동시에 밀려왔다. 일하는 기간동안 나와 거의 매순간을 붙어다니며 함께 했던 능구렁이 같은 친구도, 어쩌면 여태껏 만났던 사람들 중에서 가장 잘 통하는 사수언니도, 귀요미에다가 반전 매력까지 팡팡 터지는 석사언니도, 성격이 둥글둥글해서 언제나 스스럼 없이 대할 수 있는 박사언니도, 이 모두와 부대끼며 일할 수 있는 게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정말 나답지 않게 우울해졌었다. 다시는 보지 못할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진짜 마지막이 아니라는 것도 머리로는 알지만 마음 또한 알았다, 이게 진짜 마지막이라는 걸. 나의 삶의 한 자락이 여기서 매듭지어지고 이 사람들을 나중에 본다고 하더라도 지금과 같지 않을 것이라는 걸.

하지만 내 길이 아닌 여기에 언제까지고 머무를 수는 없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솜씨에 감탄할 수밖에 없다. 어쩜 이리도 완벽할까. 타이밍도, 클로져도, 정도도 모두 완벽했다. 나는 이 곳에 왔었어야 할 때 왔고 가야할 때에 떠났다. 적어도 지금 내가 보기에는 그렇다. 완벽한 적당함으로 경험을 쌓았고 거기에다가 덤으로 스펙을 쌓았으며 덤이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소중한 사람들을 얻었다. 난 여태까지 한번도 완벽을 추구한 적이 없었는데 내 삶은 모든 것이 완벽했다. 한 치의 오차도 없고, 한 가닥의 흩뜨림도 없이 정확하고 치밀하게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듯한 느낌이다. 이 모든 것이 미리 계획되어 있었고 이 계획은 이루어질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나는 나의 미래를 생각할 때에 내 개인적인 욕심이나 이익을 추구하기에 급급한 태도를 취하는 것보단 당장 하나님을 신뢰하는 연습을 할 것이다. 내 미래는 어디까지나 그 분의 계획의 한 부분일 뿐이고,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꼭 이루시는 분이니까. 나의 미래를 위해 준비하고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야 하는 건 맞지만 그것보다 더 우선시되야 하는 건 나의 삶의 중심이 모든 것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이다. 그 분의 관심이 지금 어디에 쏠려있고 그 분이 무얼 원하시고 있으며 어떤 것을 귀하게 여기시는 지를 알아야겠다. 인생에서 진짜 중요한 본질이 무엇인지를 간파하고 생명이 나는 근원을 더 힘써 좇아야겠다. 곧 내일 죽어서 하나님을 만나더라도 나름 자신있게 나는 하나님 생각하면서 살았다고 말할 수 있는 삶을 살아야겠다.

당신에게:

어디선가 살아 숨쉬고 있어 지금 이 글을 읽고 있을 당신에게:

당신, 안녕? 새벽에 갑자기 당신 생각이 아주 많이 나 자려고 누웠다가 참지 못하고 이불을 박차고 일어나 이렇게 글을 써요.

당신은 내가 누구인지 알 수도 있고 모를 수도 있어요. 나 역시 당신을 개인적으로 알 수도, 모를 수도 있겠죠. 우리는 길가에서 서로를 스쳐 지나갔었을 수도 있고, 함께 수업을 들었을 수도, 아니면 이미 오랫동안 알던 사이일 수도 있어요. 한번도 마주치지 않았던 사이일 가능성도 물론 있고요. 당신은 내가 스파게티를 김치와 먹는 걸 좋아한다는 자그마한 사실을 알 수도, 모를 수도 있죠. 추운 날이면 어디에 있던지 다른 사람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제자리 뜀뛰기를 해 몸을 덥히는 나를 보며 민망해 했을 수도 있고, 우리는 어설픈 우쿠렐레 반주에 맞춰 함께 노래를 불러본 적이 있을 수도, 없을 수도 있어요. 내가 꽃을 좋아해서 늘 꽃을 꺾으면 안된다고 말하면서도 예쁜 꽃을 보면 매번 그것을 꺾는 사람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당신이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어요. 어쩌면 나는 당신이 제일 좋아하는 꽃 이름을 알 수도 있겠네요. 당신이 자주 가는 맛집이나 당신의 흔한 잠버릇도 알 수도 있고요. 하지만 설령 그런 것들을 모른다고 해도 괜찮아요. 당신이 나에 대한 시시콜콜한 디테일들을 얼마나 많이 아는지, 또 내가 당신과 얼마나 많은 시간을 보냈는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지금 우리가 어떤 관계이던 간에 그건 별로 상관없기 때문이죠.

물론 우리가 서로에게 어떤 존재인지를 알고 우리의 관계가 사회적 틀 안에 꼭 맞는 안정적인 정의를 가지고 있으면 좋긴 하겠죠. 예를 들면 친구라던가, 제자라던가 그런거 말이에요. 그건 우리가 언젠가 만났었고 우리 사이에 어떤 형식의 소통이 적어도 한번쯤은 있었다는 뜻일테니까요. 하지만 난 이것보다– 사회가 정의해주는 견실한 관계의 네임밸류나 명분, 우리가 공식적으로 만날 수 있는 사이인지에 대한 여부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고 믿어요. 내가 진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당신이 헤아려줄 수 있다면 참 좋을 것 같아요. 나는요, 당신이 누구던 내가 이 새벽에 곤히 잠들지 않고 당신 생각을 많이 했다는 거, 당신을 위하는 내 마음이 너무 커서 이 마음 가지고 어떻게 해야할 지 잘 모르겠는, 그래서 이리 뒤척 저리 뒤척이는 모습을 당신이 알았으면 해요. 아니, 이 그림에서 나는 빠져도 좋으니 그냥 이 지구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당신을 위로하고 싶어하고, 당신이 웃었으면 좋겠고, 온전히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열망을 너무 강하게 느껴서 이 새벽에 쩔쩔매고 있다는 것만 알아줬으면 좋겠어요. 만약 미래에 내게 주어질 행복과 사랑의 분량이 정해져 있다면 그걸 당신에게– 당신이 누구던, 과거에 어떤 삶을 살았고 현재는 어떤 삶을 살고 있던– 몽땅 주어 당신 안에 생명과 사랑이 가득 차고 넘치게 하고 싶어요. 그래서 당신이 최고로 온전한 삶을 살았으면 좋겠어요. 만약 당신이 그런 삶을 누릴 수만 있게 된다면, 나는 내 삶에서 많은 것들을 당신에게 양보하겠어요. 만약 내가 양보해서 될 일이라면 진짜 그렇게 할거에요, 난.

이 못말리는, 그리고 때로는 감당할 수 없을 것만 같은, 진심을 당신은 마음 속에 그릴 수 있을까요? 이해가 안될 수도 있어요. 이해가 안되겠죠, 당연히. 어떻게 얼굴도, 이름도, 어쩌면 존재도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자신의 행복을 양보할 수 있냐고 반문할지도 몰라요. 친구면 친구고 가족이면 가족에 대해서 생각하는거지, 어떻게 불특정 다수를 향한 마음을 가질 수 있냐고 의심의 눈초리를 보낼 수도 있겠네요. 그런데 말이에요, 나는 이런 질문들에 대해서 이게 사랑이라는 것밖에는 할 말이 없어요. 달리 이 마음을 논리적으로 설명할 방도가 없어요. 다만 내가 너무나도 큰 사랑을 받았고 그 사랑을 통해 죽어가던 내가 살아난 경험이 있어서, 나는 그저 내가 받은 사랑을 그대로 나누어 주고 그렇게 흘려보낸 사랑이 내게 그랬듯 또 흘러가는 그곳에 생명력을 불어 넣어주길 바랄 뿐이에요. 내가 당신을 알던 모르던 당신은 나와 똑같이 인생에 대해 고민을 하고, 방황을 하며, 삶의 어려움을 맞닥뜨릴 때 힘들어하는 사람일테니까. 그런 나와 같은 당신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손해 볼거에요. 진부하게 들리지만 본질은 결코 진부하지 않은 진실, 곧 당신의 외모와 성격, 능력에 상관없이 당신의 존재만으로 당신은 존귀하고 사랑받아 마땅하다는 사실을 실천하려고 노력할 거에요. 당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품고, 아껴주고, 오래 참고, 아무것도 바라지 않을게요. 그리고 이렇게 나와 같은 당신’들’이 많은 세상에서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든 것인 것 마냥 대할게요. 이러한 맥락에서 어쩌면 이 새벽녘에 당신을 위하는 마음이 너무나도 커 혼자서 어쩔 줄 몰라하는 것은 그다지 이상한 일이 아닐지도 모르겠군요.

언제부터인지 이런 기도를 하기 시작했어요. 나를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나보다 더 복 받은 사람들이 될 수 있게 해달라고. 내가 축복의 통로로써 주위 사람들에게 복을 마구마구 흘려보내 그들이 내가 받았던 것들을 배로 받고, 내가 누렸던 행복을 배로 누려 나보다 훨씬 더 창대한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고. 그저 나와 같은 시공간에 있다는 이유만으로도 사람들이 복을 받았으면 좋겠다고. 그것이 신호등 건너편에 이어폰을 끼고 아무 생각이 없는듯 먼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아저씨가 됬던, 지하철에서 줄곧 핸드폰만 바라보고 있는 이쁘장한 언니가 됬던. 주말마다 캠퍼스에 놀러오는 축구부도, 젊음이 가득한 신촌거리에서 폐지를 줍고 리어카를 끄시는 할머니도, 빨간 입술 화장을 한, 성깔 좀 있게 생긴 학생도. 모두 다 생명을 누렸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기왕이면 나를 통해서 그 생명을 누렸으면 좋겠어요. 물론 아직 내가 많이 부족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은 여전히 사랑이기에.

당신,

힘들 때마다 꼭 기억해줬으면 좋겠어요.

당신이 누구던

나, 정말 당신을 사랑해요.

언제부턴가

언제부턴가 이런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나를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나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과 사랑과 능력을 보아 나보다 더 복된 사람들이 될 수 있게 해달라고. 축복의 통로로 사용되어서 마구마구 다른 이들에게 복을 부어줄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내가 받았던 것들을 배로, 내가 누렸던 행복을 배로 받아 나보다 훨씬 더 성공하고 창대한 사람들이 되게 해달라고. 길가에서 스쳐 지나가던, 수업을 같이 듣던,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던. 그저 나와 함께 같은 시공간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사람들이 복을 받았으면 좋겠다고. 사도 바울이 그랬듯이, 요셉이 그랬듯이, 하나님이 함께 동행하는 사람은 주위 사람들에게 생명력을 불어 넣어주고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물질적으로 번창하게 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모든 이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분의 자녀들이 흥하기를 원하신다. 지으신 그대로 회복시켜 완전하고도 온전히 성공적인 삶을 살기 원하시기 때문이다. 나는 나를 통해서 다른 이들의 삶 속에 하나님의 뜻이 하나도 빠짐없이 이뤄졌으면 좋겠다. 내 주위 사람들을 나보다 더 복이 많은 사람들로 만들었으면 좋겠다.

사랑하리 주의 뜻을 따라

그가 하신 모든 일을 따라

예배하리 순종의 길에서

세상은 주의 영광을 보리

주의 뜻 이뤄지리!

덤으로 사는 인생

점심을 먹으러 기숙사 식당으로 내려가 식권 자판기 앞에 줄을 서 있었다. 내 앞에는 어떤 남학생과 여학생이 서 있었는데 둘다 내게 등을 돌린 채로 여학생은 자판기에서 계산을 하고 있었고 남학생은 여학생의 가녀린 팔뚝을 잡고 있었다. 남학생은 꼬불꼬불한 파마머리에 핫핑크 옷을 입고 있었고 시험기간인지라 여학생은 모자와 안경을 쓰고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다만 내가 별 생각없이 줄에 서 있다가 남학생이 여학생의 팔을 붙잡고 있는 모습을 보고 그것을 좋지 않게 생각했던 건 확실하다. 이건 대략 내 마음 속에서 그 당시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오던 생각들이다:

‘아니 아무리 좋아도 그렇지, 계산하는데 뭘 저렇게 붙잡고 있어… 보아하니 여학생이 남학생의 식권까지 계산해주는 모양인데, 아무리 커플이라도 공공장소에서 있거나 한 사람이 다른 일을 보고 있으면 서로를 좀 가만히 냅둬야 하는 거 아니야? 게다가 파마머리는 뭐야.. 그리고 핫핑크라니. 촌스러워! 저 여자애도 분명 시험기간이 아닌 평소 때는 화장을 덕지덕지하고 다니겠지, 자존감을 높이려고. 한국애들은 다 그렇잖아. (나는 그렇지 않지. 나는 이 사람들과 달라) 역시 나는 내가 커플이던 커플이 아니던 이렇게 대놓고 커플짓하는 사람들을 내켜하지 않아. 특히 한국에서의 내 또래 젊은 커플들은 정말 마음에 안 든단 말이지. 서로를 보는 것보다 남의 시선에 더 많이 신경쓰고 보여주는 것에 집중하고. 분명 대다수의 커플들이 서로를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을거야. (하지만 난 그렇지 않지. 나는 진정한 사랑을 하는 사람이라구. 진정한 사랑을 통해 다른 사람을 바꿔본 경험이 있지 훗. 저들은 이런 경험을 해본 적이 없을 거야) 난 이것에 대해 확신해.’

막상 써놓고 보니 내가 이런 생각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가졌다는 게 충격적이고 부끄럽고 슬프다. 하지만 나는 당시에 분명 저런 부류의 생각들을 했었고 그것에 대해 아무렇지도 않았다. 두 사람이 계산을 다 마치고 뒤돌아서 나를 보기 전에는 말이다. 여학생이 식권을 두 장 쥐고 뒤돌아 나를 지나쳐 식판으로 향했을 때 남학생은 여전히 여학생에게 매달리고 있었다. 그는 장님이었다. 순간 그의 감겨진 눈을 보는데 멍해졌다. 맙소사. 후라이팬으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 같았다. 그는 내가 처음 보는 사람이 아니었다. 기숙사를 돌아다니면서 한두번 마주친– 그리고 마주칠 때마다 안쓰럽기도 하면서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이 되는– 사람이었다. 기다란 지팡이를 들고 바닥을 탁, 탁 때리며 길을 찾던 그의 모습이 뇌리에 느쳤다. 지팡이를 잃어버렸던 걸까? 그는 여학생의 팔뚝을 꼬옥 잡은 채 밥을 받으러 갔고 나는 한없이 작게 느껴졌다. 그 “커플”을 눈에 담기조차 미안했다. 내 생애 가장 부끄러운 순간이었다. 불과 몇 초 전에 생각했었던 ‘나는 저렇지 않지’와 ‘난 이것에 대해 확신해’라는 감정들이 얼마나 교만하고 투박하고 어리석은 것들이었는지. 그렇다. 나는 저렇지 않았다. 나는 저것보다 못했다. 나는 절대 확신할 수 없는 것에 대해 확신을 가질 만큼 잘 모르고 미숙했다. 얼떨떨한 기분으로 식권을 사 밥을 받으러 갔는데 내 앞에 그 남학생이 있었다. 원래 반찬이 앞에 쭈욱 나열되어 있었서 스스로 가져가는 시스템인데 밥을 나누어 주시는 아주머니께서 그 학생에게 “조금만 더 옆으로 가, 더 옆으로”라고 말씀하시며 다음 반찬이 어디 있는지 알려주셨다. 그 학생은 곧 반찬을 다 가지고 밝은 목소리로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고 자리로 갔다. (지팡이도 없이 손에 식판을 들고 어떻게 자리를 찾아갔는지는 보지 않았다. 그 남학생을 볼 면목이 없었다.) 다시금 대단하다고 느꼈다. 남들이 겪지 않는 어려움을 겪는데도 불구하고 밝고 씩씩한 성격을 가지고 있는 사람 같았다. 한편으로는 그에게 다가가서 사과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고 (“저기요, 정말 죄송한데 제가 그쪽에 대해 이러이러한 생각을 했었어요. 그런데 알고 보니 그게 아니었더라고요.. 이런 오해를 해서, 또 이런 나쁜 생각을 해서 정말 미안해요. 내가 정말 미안해요.”) 다른 한편으로는 그를 마주할 엄두도 나지 않았다.

창가쪽에서 점심을 먹는데 밖의 잔디가 너무나도 푸르고 하늘은 더 푸르렀다. 공기는 햇살로 가득차 눈이 부셨고 모든 것은 빛이 났다. 음식을 씹으며 멍하니 창 밖을 바라보는데 새삼 깨달았다. 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를. 내가 여태까지 너무나 당연시하고, 시각이라는 걸 인지하지도 못하고 있었는데 이건 결코 당연한 게 아니라는 걸. 언젠가 들었던 설교에서 목사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었다. 우리 모두는 덤으로 사는 거라고. 영생을 얻을 자격이 눈곱만치도 없는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영생을 주셨으니 이제 우리의 삶은 다 덤이라고. 나는 오늘 다시 한 번 나의 바닥을 보았고 나의 본능이 얼마나 죄로 가득 차 있는지 살짝 가늠할 수 있었다. 역시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오셨어야 했구나. 썩은 사과를 냉장고에 계속 둔다고 썩은 것이 괜찮아질 수 없듯이 내게는 정말 소망이 없구나. 썩어진 건 버려질 수밖에 없는, 버릴 수 밖에 없는 운명이구나. 내가 마땅히 가져야 하는 건 아무것도 없다. 십자가도, 생명도, 시각도, 맛있는 음식도, 좋은 성적도. 이 삶에서 내가 마땅히 취해야 하는 건 없다. 나는 그저 죄인이기 때문에 그저 모든 것이 은혜이고 덤이 되는 것이다. 덤으로 사는 인생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감사합니다”하는 것 밖에 없다. 건강에 감사합니다. 건강한 가족에 감사합니다. 편안히 공부할 수 있는 환경에 감사합니다. 맛없는 학식에 감사합니다. 안정된 생활에 감사합니다.

동시에 내가 판단할 수 있는 것 또한 아무것도 없다. 나는 그 무엇도 판단을 할 위치도, 주제도 안되기에 결국 나는 나만 잘하면 된다. 나 혼자 잘하기도 버거운데 무슨 다른 사람을 판단하겠는가. 그렇기에 삶의 모든 부분은 0에서 시작하지 않고 +에서 시작한다. 이 사실을 인식해서 감사함으로 살던 인식하지 못해서 불평하며 살던 이건 팩트(fact)다. 이 사실을 인식하지 못해 다른 사람들을 평가하고 내 잣대를 들이대며 가치를 매기면 그건 무지함을 드러내는 일밖에 되지 않는다. 나는 내 주제도 모르는 사람이오, 하고 대놓고 외치는 것과 다름이 없는 행동이다. 물론 인간이란 피조물은 종종 그런 무지함을 범하긴 한다. 피조물이 조물주에게 왜 나를 이렇게 만들었냐고, 왜 나를 이런 상황에 몰아넣었냐고, 따지는 일이 종종 있다. 하지만 그건 나 자신을 모르고 또 하나님을 몰라서 하는 소리다. 마치 내가 오늘 보았던 남학생이 처음에는 장님인 줄 모르고 왜 여학생의 팔을 그렇게 붙잡고 있었냐고 속으로 나무랐던 것처럼. 전체를 보지 못하고 부분만 보기에 오해를 하고 편견을 갖는 것이다. 내 삶이 덤이라는 사실을, 결국 하나님이 나에게 (의무적으로) 해줘야 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동시에, 그리고 예수님께서 전혀 하시지 않아도 되는 희생을 나를 위해 감당해내셨다는, 이해가 전혀 되지 않는 사실을 인식할 때 내 삶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진짜 ‘덤’이구나, 를 실감한다. 다시 낮아진다.

아이유- 밤편지

 

난 우리의 첫 입맞춤을 떠올려

그럼 언제든 눈을 감고

가장 먼 곳으로 가요

한 소녀는 누군가를, 또는 무엇을, 사랑했다. 가끔 길을 걷다가 문득 멈춰서서 그 사랑에 대해서 생각했다. 침대에 엎드려 누웠을 때는 몸이 침대 속으로 꺼져 지구를 뚫고 저 반대편으로 뿅, 하고 나오는 상상을 했으며 스파게티를 김치와 먹는 것을 좋아했다. 그녀는 꽃을 좋아해서 꺾지 말아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당부하면서도 꽃을 꺾는 사람이었다. 어쩌면 아이스크림보단 얼음을 씹어먹는 걸 더 좋아했고 빗소리와 섞인 오르골 소리도 종종 듣는 습관이 있었다. 추운 날이면 어디에 있던지 제자리에서 뜀뛰기를 해 몸을 덥히는 그런 사람이었고 남의 시선을 꽤나 아랑곳하지 않는, 마이웨이의 철학을 물려받은 딸이었다. 어떤 것들에 대해서는 눈을 감기를 택했으며 또 어떤 것들에 대해서는 눈에 불을 키고 보았다. 먹고 싶은 건 꼭 먹어야 한다고 하면서도 먹고 싶은 것을 먹을 때에는 죄책감을 느꼈으며 먹지 못하는 사람들을 떠올렸다. 또래 학생들이 북적거리는 거리를 걷다가도 리어카를 끌고 가시는 할아버지를 보면 마음이 시렸고, 촌스러운 꽃무늬가 가득한 옷을 입고 횡단보도에 서 계시는 할머니를 보면 자기 할머니가 보고 싶어지는 손녀였다. 소녀는 늘 웃고 다녔지만 어떤 때는 느닷없이 눈물을 쏟아내는 자신을 발견했고 멀리 떨어져 있는 부모님께는 얘기하지 않았다. 그녀는 많은 것들에 대해서 감사했지만, 그건 때론 슬픔이 서린 감사였고 때론 마법 같은 행복이 반짝거리는 감사였다.

어떻게 나에게 그대란 행운이 온걸까

지금 우리 함께 있다면 아, 얼마나 좋을까요

소녀 주위에는 늘 소녀를 좋아하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으나 소녀는 그들을 사랑하면서도 사랑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들이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만 이어폰을 귀에 꽂고 본척 못 본척 스치듯 지나가는 사람이던 몇 년째 이불 속에서 속닥속닥 속얘기를 나누던 사람이던 동일하게 사랑했던 것 같다. 그래서 친구라는 이름의 사람이 훌쩍 떠나도, 전에는 말도 섞어보지 않았던 사람이 친하게 지내고 싶다고 했을 때도, 그저 덤덤하게 받아들였던 것 같다. 소녀는 사람에 대해서 뜨거웠지만 아주 차가울 수도 있는 사람이었다.

난 파도가 머물던 모래 위에 적힌 글씨처럼

그대가 멀리 사라져 버릴 것 같아 늘 그리워, 그리워

여기 내 마음 속에 모든 말을 다 꺼내어 줄 순 없지만

사랑한다는 말이에요

소녀는 아주 오랫동안 자신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일거라고 믿고 있었다. 어쩜 삶이 이토록 마법 같을까, 그녀는 종종 조용한 탄성을 지르곤 하였다. 만약 망토를 쓴 누군가가 다가와 너는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것이라고, 이건 진짜 현실의 실체가 아니라고 이야기한다면 단박에 믿을 것 같은, 그런 삶을 살았다 소녀는. 연필심을 유심히 바라보면 다이아몬드가 보이고 자신과 아무 관계 없는 것들을 보며 활짝 웃을 수 있는 그런 삶을 살았다. 그래서인지 어쩌다 한 번 깨어있는 새벽녘이 되면 그토록 삶이 그리웠다. 지금 이 순간의 모든 것이 바뀌지 않았으면– 늙지 않았으면, 잊혀지지 않았으면, 없어지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으로 차오르면서 행복과 아쉬움이 뒤엉킨 밤들을 보냈다. 그리고 그럴 때면 소녀가 할 수 있는 말은 사랑한다, 밖에 없었다.

 

착각

요즘은 이런 생각을 많이 한다. 내가 착각을 하던 말던 현실은 그만의 방식으로 돌아간다는 것. 그래서 내 맘대로, 내가 생각하고 싶은 대로 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라 진짜 현실을 직시하고 정확히 판단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특히 오늘은 친구가 허리가 아파서 정형외과에 다녀왔는데 의사선생님께서 친구의 자세가 좋지 않아 근육에 무리가 왔다는 진단을 하셨다. 친구는 원래 본인이 자세가 나쁜 편이 아니라고 생각했었는데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며 충격적이라고 말했다. 순간 오늘 아침에 읽었던 말씀이 떠올랐다:

“I care very little if I am judged by you or any human court; indeed, I do not even judge myself. My conscience is clear, but that does not make me innocent. It is the Lord who judges me. Therefore, judge nothing before the appointed time; wait until the Lord comes. He will bring to light what is hidden in darkness and will expose the motives of the heart. At that time each will receive their praise from God.” (1 Corinthians 4:3~5)

재판장은 따로 있다. 나는 재판장이 아니다. 내가 보기에 어느정도 옳게 살아도 재판장의 기준에서 옳게 살지 않으면 내가 아무리 우겨봤자 소용이 없다. 나는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나의 생각일 뿐이다. 일이 잘 풀린다고 해서, 성적이 잘 나오거나 취업이 좋은 곳에 된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내가 잘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다만, 현실은 냉철해서 열매는 절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아무리 본인 스스로가 자세가 좋다고 생각을 해도 실제로 자세가 좋지 않으면 몸은 아프기 마련이다. 몸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시험준비를 잘했다고 믿고 싶지만 정말 시험준비를 잘했는지는 시험을 쳐야 아는 법이다. 현실은 개인의 착각에 속지 않는다. 속는 건 개인일 뿐이다.

성경에서 사탄을 거짓의 아비라고 부른다. 사탄은 속인다. 거짓말을 한다. 선악과를 따먹으면 죽지 않는다고 하와에게 속삭였지만 결국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따먹음으로써 죽는다. 지금 이 고통이 영원하지 않지만 영원할 것이라고, 부정적인 시각을 확대시켜 그것이 다인 것 마냥 그 친구의 마음에 속삭였을 것이다. 이 벌을 너는 피할 수 없을 거라고, 그래서 감옥을 들어갈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거짓말을 해 그 친구를 죽음으로 내몰았다. 인간은 너무 큰 죄를 져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다고, 이미 늦었다고, 마음에 두려움을 불어넣는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다 거짓말이다. 선악과를 먹으면 분명히 죽고, 벌을 피할 수도, 모면할 수도 있지만 그 후에는 또 삶이 계속되며, 하나님의 사랑이 씻을 수 없는 ‘너무 큰 죄’는 없다. 사탄은 마땅히 거짓의 아비다.

진리를 받아들이고 안 받아들이고는 개개인의 선택이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없다고 자기 마음대로 생각해버리면 그만이라고 생각하지만 결국 하나님은 계시고, 그 분은 재판장이시다. 기독교를 종교로써 받아들이고 받아들이지 않고의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생사의 문제이며, 이 현실을 부정하고 무시해버리면 그만인 일이 아니다. 차갑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건 본인 손해인 것이다. 현실을 최대한 빨리 받아들이는 것이 지혜다. 물론 현실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는 각자의 의견이 다르고 여기서 믿음이 갈리는 것이지만, 크리스챤으로써 나는 현실을 하나님으로, 예수님으로 받아들이기로 결단한다. 내게 하나님의 생명력과 사랑보다 더 현실적인 것은 없다. 비록 하나님에 대해 거부감이 없잖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하나님의 은혜의 열매를 부정할 수 없다. 열매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기준이 된다는 건 결국 말씀이 나의 유일한 기준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내 생각대로, 내 뜻대로 하지 않겠다는 데에는 하나님이 재판장이시기에 나의 판단은 기준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인정하는 태도가 깔려있다. 사도바울은 본인이 거리낌이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자신이 느꼈던 자신감을 신뢰하지 않았다. 스스로에 대한 판단을 보류하며, 하나님의 판단을 기다리고 구했다. 솔직히 나는 자신이 없다. 나는 거리끼는 것이 한두가지가 아니며, 내 스스로 보기에도 정말 흠이 많은 연약한 사람이다. 그러니 하나님 보시기에는 얼마나 더할까? 분명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것이다. 오늘은 마음이 무겁고 조금 무서웠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 잘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보실지 잘 모르겠다. 하나님 보시기에 나는 어떨지, 조금 무섭다.

하나님의 마음으로 알려고 애쓰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하는 이유가 하나 더 더해졌다. 그저 하나님을 사랑해서 뿐만 아니라, 그래야 내가 사니까. 재판장의 시각에서 나의 삶을 바라봐야, 그래야 내가 진정으로 더 깨끗하고 거룩한 영혼이 되니까. 그래야 말 그대로 “하나님 보시기에” 사랑스러운 사람이 될 수 있으니까.

결국에 난

조금은 불편하게 살아야 한다. 너무 안일하게, 편안하게, 그래서 생각없이, 좁게, 살면 안된다. 그건 내가 받은 사랑과 자비와 은혜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늘 편안하기만 하면 내가 사는 세상도, 가질 수 있는 마음도 좁아지기 마련이다. 캐나다 퀘백에서 문명을 벗어나 자연에서 생활할 때, 우연히 시리아 아이들이 전쟁 속에서 죽어가는 영상을 보았을 때. 바쁘고 중독성 있는 일상 속에서 이따금 나를 스치듯 지나가는 생각들을 놓쳐서는 안된다. 그저 한 때의 추억으로, 하나의 자극적인 영상으로 치부해버리면 안된다. 그건 생명에 대한, 정의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오늘 아빠와 통화하면서 무심코 이런 말을 해버렸다. 나는 이 상황에서 감사할 것이 없다고. 이성적으로는 감사할 거리가 많다는 것을 알았지만 마음으로는 전혀 감사가 느껴지지 않았다. 이번 학기 도심과 멀리 떨어진 기숙사에서 살게 된 이후 나는 하나도 행복하지 않다고, 너무 수고가 많다고 느낀 적이 한두번이 아닐 정도로 이 곳은 내게 영적으로 꽤나 열악한 곳이었다. 잘 먹지도 못하고, 샤워를 할 따뜻한 물이 잘 나오지도 않고, 먼 거리를 매일 빠짐없이 왔다갔다 해야하고, 하고 싶은 공부도 마음껏 하지도 못할 뿐더러 방에 들어오면 쉼이 아니라 계속 싸워야만 하는 이 곳. 게다가 이제는 환절기 감기까지 걸려 일주일째 앓고 있다니. 하나도 감사하지 않았다. 마음 속에는 내가 가지지 못한 것들에 대한 원망과 욕심으로 가득 차 있었고, 이 모든 것들을 포기하면서까지 난 잘해보려고 했으나 아무런 성과가 없는 듯한 이 상황이 싫었다. 옳은 결정을 내린 것을 처음으로 후회했다. 이럴거면 차라리 오지 말걸. 내가 이렇게 불평하고 내가 내린 결정에 대한 뒷감당을 하지 못할 줄 알았으면 차라리 옳은 결정을 내리지 말걸. 내 그릇은 이것밖에 안되는구나, 하면서도 왠지 모르게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하나님께서 내게 너무 무리한 요구를 하신다고 느꼈고, 그것이 부당하다고 느꼈으며, 하나님을 포함한 기독교 자체를 거부하고 싶은 마음이 또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왜 진리는 우리의 본성을 거스르도록 강요할까? 진실로 생명이고, 진실로 진리라면 왜이리 어렵고 힘들까?

이럴 때가 있다. 진리가 진리임을 명백히 알면서도 거부하고 싶은 마음. 이 모든 것에 대해 등을 돌리고 싶은 마음. 이것이 진리던 아니던 내 알 바 아니라고 하며 어깨를 툴툴 털고 일어나 내 갈 길을 가고 싶은 마음. 하지만 시리아에서 아이들이– 열 살도 채 안되어 보이는 아이들이– 입에 거품을 물며 희미해져가는 눈동자로 허공을 응시하는 모습을 볼 때 나는 다시금 깨달았다. 아무리 아프고 아무리 괴로워도 보아야할 것들을 보고 느껴야 할 것들은 느껴야 한다고. 아무리 내 삶이 내게 중요하다고 하더라도 눈을 들어, 시선을 내게서 옮겨 다른 이들과 신을 보아야 한다고. 당장 내일까지 끝내야 할 과제도 중요하고, 내 몸이 아파 빨리 낫게 약을 먹어야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지구 저 편에서 말도 안되게 죽어가는 아이들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무언가를 하는 것도 말도 안될 만큼 중요하다. 내가 너무 안일하게 나의 삶에 대해서만 생각하다 보니 내가 품을 수 있는 세상이, 생각할 수 있는 범위가 너무 좁아진다는 것을 깨달았다. 잘 먹지 못하고, 따뜻한 물로 마음껏 샤워를 하지 못하고, 감기에 걸려서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것이 내게 힘든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더 넓은 세상을 인식하는 순간 나의 작음을 조금 더 알게 된다. 힘듦을 비교하자는 것이 아니다. 우리 모두는 각자 자신만의 전쟁을 하고 있고 자신만의 시련과 좌절이 있기에 서로를 비교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현명하지 않다. 다만 개인의 삶으로부터 고개를 들어 세상을 바라보기 시작하면 나라는 존재가 얼마나 작은지, 해서 내가 겪는 시련과 어려움 또한 비교적 얼마나 작은지에 대해 생각할 수 있다. 캐나다 대자연 속에서 열흘 남짓 생활하면서 그 누구도 내게 내가 겪고 있는 일로 인해 힘들어하지 말라고 말한 적이 없다. 아무도 내가 어떤 어려움을 겪고 있었는지 몰랐기에. 하지만 그 누구의 위로도 필요치 않았던 건 나 스스로가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에 대한 깨달았기 때문에 나는 힘든 상황 속에서도 힘들어하지 않을 수 있었다. 힘든 마음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힘들게 하는 요소가, 또 내가, 이 세상에서 얼마나 작은 부분인지를 알았기에 힘들지만 동시에 힘들지 않을 수 있었다.

어쩌면 지금 느끼는 약간의 불편함도 내가 느껴야 하는 것들 중 하나일 수도 있다. 알아야 할 것들을 제때 알지 못하고 느껴야할 것들을 온전히 느끼지 못하면 성장할 수 있는 만큼 성장하지 못하기에 나는 다시금 마음을 다잡고 조금 불편하게 살자고 스스로에게 말한다. 감사할 거리가 없어보이는 상황에서 감사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면 감사하자고 다짐한다. 거부하고 싶은 마음을 꿀꺽 삼켜야 한다면, 알약을 힘겹게 삼키듯 그렇게 삼켜야 한다면 나는 삼키겠다. 비록 자꾸만 변덕을 부리는 나지만 만약 변덕을 안 부리는 방법을 터득하는 중에 변덕을 계속 부려야하고, 그에 대해 내 자신에게 계속 실망을 해야한다면 기꺼이 그렇게 변덕을 부리며, 실망하며, 변덕을 줄여 나가겠다.

결국에 난 이 삶을, 이 세상을 최선을 다해 살아내겠다.

조바심이 나는 나에게

마음만 가지고는 안된다는 걸 최근에 깨달았다.  아무리 마음이 굴뚝 같아도, 진심이 타오를 것 같아도 그 열망을 행동으로 옮기지 않으면, 잘 갈고 닦은 실력으로 끌어 모으지 않으면, 그건 그저 잠깐의 감정에 불과하다고. 감정을 폄하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계획과 실천에 차이가 있듯이 마찬가지로 감정과 열정에도 확연한 차이가 있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것 뿐이다. 분명 감정만으로는 세상도, 나도 바꿀 수가 없다. 무언가를 바꾸려면, 영향력을 키우려면, 마음만 앞서서는 충분하지 않다. 실력이 필요하다.  훈련이 필요하고 그릇을 넓히는 과정을 겪어야 한다. 광야를 겪어야만 높이 올라갔을 때에 허무하게 추락하지 않을 수 있다. Be patient, Grace.

 

그리고 또

나는 고생을 하면 안된다고 생각하면 안된다. 여태까지 무의식 중에 나라는 사람은 인생에서 꽃길만 걸어야 한다고, 평범한 삶을 살고 싶지 않다는 열망으로 시야가 좁아져 그렇게 굳게 믿고 있었다. 내게 고생은 먼 얘기라고. 그래서 그렇게 칭얼댔던 것 같다. 결정을 내려놓고서도 그 결정에 따르는 결과가 부당하다고 생각했던 것도, 나의 기대에 부흥하지 못했기 때문에 현실을 옳지 않다고 판단했던 것도, 그리고 이 상황이 억울하기만 하다고 느꼈던 마음도 모두 이 무의식적인 교만함 때문에 생긴 감정들이다. 나는 특별한 삶을 살아야 하니까, 이런 평범한 어려움 따위는 겪지 말아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분명히 옳은 결정을 내렸는데 왜 결과는 피폐한 삶일까? 나는 여태까지 늘 행복했었는데 옳은 결정을 내린 지금은 왜 행복하지 않지? 이건 무언가 맞지 않아. 나는 행복해야 한다구. 이전에 그랬던 것처럼, 앞으로도 행복해야 하는 나야.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며 내가 내린 결정에 대한 보답이 없는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고, 때문에 나는 억울하고 부당하다고 느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나의 질문 자체가 오답이었다. 옳은 결정은 늘 풍성함을 가져다주지 않을 뿐더러 내가 현재 처한 상황에서의 옳은 결정은 피폐한 삶을 초래하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나는 옳은 결정을 내렸기 때문에 삶이 피폐했던 것이다. 무언가 맞아도 아주 맞았던 것이다. 부족하지만 십자가의 길을 택했기 때문에 힘들었던 것이고, 나름 좁은 문을 통과하려고 애썼기 때문에 자꾸 마음이 어려웠던 것이다. 만약 쉬운 길, 넓은 길을 택했더라면 분명 지금처럼 행복하지 않다고 느끼진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신앙은 행복에 대한 것이 아니다. 크리스챤으로 산다는 것에서 행복은 최종 목적이 아니다. 신앙생활에서의 주인공은 누가 뭐래도 하나님이고, 예수님을 따라간다는 것은 말 그래도 하나님의 영에 이끌려 삶을 의미한다. 내가 원하는 것들, 내가 이루고 싶은 것들, 그리고 나의 행복을 원하는 자아가 촛점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과 그 분의 나라가 임하는 것이 촛점이다. 그렇기에 크리스챤, 즉 작은 예수가 된다는 것은 어마무시한 일이다. 예수님을 믿기로 결정하는 동시에 스스로의 자아를 부인하고 뼛속까지 박혀있는 죄성– 죄로 쩔어있는 자기 자신–과 싸우는 전쟁의 시작이다. 어떤 목사님의 말에 의하면, 예수님을 믿는다는 건 자기 자신에게 사형선고를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한다. 사형선고를 받은 죄수가 행복한지 여부를 그 어느 누가 최종 목적으로 삼는단 말인가? 이렇듯 개인의 행복은 신앙생활에서 포인트가 아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행복은 분명 최종 목적과 함께 온다. 그것도 그냥 일상생활에서 느끼는 행복이 아니라 하늘에서 내려오는 진정한 행복. 상황과 환경에 제한되지 않는 그 행복이 하나님을 닮아가고 하나님의 나라의 임하심을 사모함에 있다. 복음은 참으로 역설적이고, 논리를 뛰어넘는다는 것을 다시금 느낀다. 행복을 추구하진 않지만 결국엔 그 무엇보다 큰 기쁨을 누릴 수 있다. 스스로를 부인하지만 결국 진정한 자아를 찾게 되기 마련이다. 지으신 그대도 회복시키시기 위해서는 현재의 죄에 찌들린 모습을 버려야만 한다. 져야만 이기는 예수님의 섭리다.

그렇기에 내가 선택한 나름의 좁은 길도 당연히 어려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더 예수님을 닮아가고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사랑스러운 영혼이 되려면 옳은 선택 뒤에 따르는 훈련을 받아야 한다. 지름길은 없다. 더 쉬운 길도 없다. 이전처럼 계속 행복하게 지내야만 한다는 건 나의 착각이었다. 하지만 첩첩산중에 놓여있을지라도 그곳을 지나갈 수 있는 힘을 성실히, 꾸준히 공급해주시는 이가 있기에 어려움을 뚫고 지나갈 수 있는 것이다. 광야를 피하게 해달라는 기도보다는 인고의 시간을 잘 버텨내 광야를 무사히 통과할 수 있도록 그 분의 인도하심과 도우심을 구하는 기도가 더 성숙한 믿음의 기도임이 틀림없다. 광야에 놓인 이상, 전진이 없다면 제자리에 가만히 서있는 것도 후퇴이기에– 믿음은 성장이 없으면 소멸할 수밖에 없다– 계속 앞으로 나아가는 것밖에는 방도가 없다.  앞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죽고, 앞으로 나아가려면 힘이 필요하다. 그래서 도우심을 구하는 것이다.

솔직성히 이것을 깨달은 지금도 나는 잘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만한 결정을 내리긴 내렸지만 그 결정에 대한 책임을 충실히 지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 아쉽고 또 면목이 없다. 작은 시련 앞에서도 그렇게 툴툴대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던 내 모습을 돌아보면 얼마나 철없고 생각이 짧았는지. 또다시 나의 무지와 작음을 깨닫는다. 감사한 것은 오늘 내가 던지는 질문은 ‘왜 나는 이전처럼 행복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은가?’에서 ‘그리고 또 무엇을 할 수 있을까?’로 바뀌었다는 점이다. 옳은 선택에 따르는 광야의 길을 어차피 걸어야 한다면 몸을 사리지 않고 힘껏 뛰겠다. 내게 주어진 인고의 시간 중 이리저리 조금이라도 더 성장할 수 있도록 궁리하겠다. 나의 모난 모서리들이 다듬어지기 위해 더 적극적으로 배우고, 말씀을 읽고, 기도를 하며 하나님의 목소리를 경청하겠다. 그래서 광야의 끝에 다다를 때면 하나님의 안테나와 나의 안테나가 맞닿을 수 있도록. 나의 삶에서 예수님의 향기가 더 진하게 나도록. 하나님의 작은 속삭임에도 즉각적으로 반응할 수 있는 영적인 민감함을 가질 수 있도록. 말씀을 나의 삶에 유일한 지표로 삼을 수 있도록.

그리고 또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선택의 여지

엄마가 그랬다, 믿음은 사용하는 거라고. 어렵고 힘들 때, 두려울 때,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때, 그 때서야 비로소 진정한 믿음이 힘을 발휘하는 것이라고. 나는 아직까지 믿음의 힘을 발휘할 줄 모르는 것 같다. 시련이 닥치면 파도를 보고 상황에 휩쓸려 하나님께 시선을 두기가 어렵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 고난을 내게 허락하신 것 같다. 광야를 거쳐 더 단단하고 강한 믿음을 갖게 되었던 믿음의 선조들이 그랬듯이, 시련의 시간 속에서 성숙해지고 단련되어가는 과정을 나도 겪고 있는 것 같다. 물론 그들이 겪었던 어려움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나의 시련은 하찮고 가소로운 것이지만, 그 하찮고 가소로운 것도 나는 버거워하고 힘들어하고 있다. 다시금 느끼지만 나는 정말 나약하다. 너무나도 쉽게 넘어지고 흔들리며 유혹에 넘어간다. 그런 의미에서 이 어려움은 내게 정말 필요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상식적인 머리와 동떨어진 생각을 해본다. 나는 내가 무어을 진짜 필요로 하는지 잘 알지 못한다. 그만큼 인간이란 존재는 어리석고 무지하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해달라고 기도를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방법 외에는 덜 좋은 길밖에 없기 때문이다. 나는 엄마아빠가 미얀마에서 선교를 하시게 된 것도, 내가 한국으로 대학을 오게 된 것도, 다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는다. 엄마는 미얀마 선교가 죽는 길이라고 생각했고 나는 미국으로 대학을 가는 것이 내게 최선의 길이라고 굳게 믿었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미얀마에서의 선교는 사는 길이었고, 한국으로 대학은 온 것은 내 인생 중에서 가장 큰 축복 중 하나였다. 그래서 나는 잘 안다, 내가 얼마나 모르는지를. 하나님을 신뢰하고 모든 것을 그 분께 맡기는 것은 내게 선택사항이 아니다. 나는 하나님께 백기를 들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믿는다, 이 고난도 내게 꼭 필요한 것이라고. 왜 필요한 지는 이해되지 않고 내 방식대로 살고 싶을 때도 많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하나님께 붙어있을 수 밖에 없다. 내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2017년에도, 그 후년에도, 그리고 계속 나는 선택의 여지가 없기를 기도한다. 하나님께서 강권함으로, 때로는 매로, 때로는 사랑으로, 축복으로, 나를 이끌어 가시기를 기도한다. 설령 내가 울면서 질질 끌려가는 처지라도 내게 선택의 여지가 없기를 기도한다. 그 때가서 이 기도를 후회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내가 어쩔 수 없이 가야만 하는, 살아내야만 하는 최고의 하나님의 길을 나로 하여금 걷게 하시기를 원한다. 그리고 이 모든 시간들을 통해 결국엔 하나님을 더 닮아 하나님의 뜻이 내 뜻이 되고 그 분의 생각이 내 생각이 되기를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