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to the full!

“The thief comes only to steal and kill and destroy; I have come that they may have life, and have it to the full. I am the good shepherd. The good shepherd lays down his life for the sheep.” (John 10:10-11)

“Rejoice in the Lord always. I will say it again: Rejoice!” (Philippians 4:4)

Clinging for life to all Your promises

결국에 난

조금은 불편하게 살아야 한다. 너무 안일하게, 편안하게, 그래서 생각없이, 좁게, 살면 안된다. 그건 내가 받은 사랑과 자비와 은혜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늘 편안하기만 하면 내가 사는 세상도, 가질 수 있는 마음도 좁아지기 마련이다. 캐나다 퀘백에서 문명을 벗어나 자연에서 생활할 때, 우연히 시리아 아이들이 전쟁 속에서 죽어가는 영상을 보았을 때. 바쁘고 중독성 있는 일상 속에서 이따금 나를 스치듯 지나가는 생각들을 놓쳐서는 안된다. 그저 한 때의 추억으로, 하나의 자극적인 영상으로 치부해버리면 안된다. 그건 생명에 대한, 정의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오늘 아빠와 통화하면서 무심코 이런 말을 해버렸다. 나는 이 상황에서 감사할 것이 없다고. 이성적으로는 감사할 거리가 많다는 것을 알았지만 마음으로는 전혀 감사가 느껴지지 않았다. 이번 학기 도심과 멀리 떨어진 기숙사에서 살게 된 이후 나는 하나도 행복하지 않다고, 너무 수고가 많다고 느낀 적이 한두번이 아닐 정도로 이 곳은 내게 영적으로 꽤나 열악한 곳이었다. 잘 먹지도 못하고, 샤워를 할 따뜻한 물이 잘 나오지도 않고, 먼 거리를 매일 빠짐없이 왔다갔다 해야하고, 하고 싶은 공부도 마음껏 하지도 못할 뿐더러 방에 들어오면 쉼이 아니라 계속 싸워야만 하는 이 곳. 게다가 이제는 환절기 감기까지 걸려 일주일째 앓고 있다니. 하나도 감사하지 않았다. 마음 속에는 내가 가지지 못한 것들에 대한 원망과 욕심으로 가득 차 있었고, 이 모든 것들을 포기하면서까지 난 잘해보려고 했으나 아무런 성과가 없는 듯한 이 상황이 싫었다. 옳은 결정을 내린 것을 처음으로 후회했다. 이럴거면 차라리 오지 말걸. 내가 이렇게 불평하고 내가 내린 결정에 대한 뒷감당을 하지 못할 줄 알았으면 차라리 옳은 결정을 내리지 말걸. 내 그릇은 이것밖에 안되는구나, 하면서도 왠지 모르게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하나님께서 내게 너무 무리한 요구를 하신다고 느꼈고, 그것이 부당하다고 느꼈으며, 하나님을 포함한 기독교 자체를 거부하고 싶은 마음이 또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왜 진리는 우리의 본성을 거스르도록 강요할까? 진실로 생명이고, 진실로 진리라면 왜이리 어렵고 힘들까?

이럴 때가 있다. 진리가 진리임을 명백히 알면서도 거부하고 싶은 마음. 이 모든 것에 대해 등을 돌리고 싶은 마음. 이것이 진리던 아니던 내 알 바 아니라고 하며 어깨를 툴툴 털고 일어나 내 갈 길을 가고 싶은 마음. 하지만 시리아에서 아이들이– 열 살도 채 안되어 보이는 아이들이– 입에 거품을 물며 희미해져가는 눈동자로 허공을 응시하는 모습을 볼 때 나는 다시금 깨달았다. 아무리 아프고 아무리 괴로워도 보아야할 것들을 보고 느껴야 할 것들은 느껴야 한다고. 아무리 내 삶이 내게 중요하다고 하더라도 눈을 들어, 시선을 내게서 옮겨 다른 이들과 신을 보아야 한다고. 당장 내일까지 끝내야 할 과제도 중요하고, 내 몸이 아파 빨리 낫게 약을 먹어야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지구 저 편에서 말도 안되게 죽어가는 아이들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무언가를 하는 것도 말도 안될 만큼 중요하다. 내가 너무 안일하게 나의 삶에 대해서만 생각하다 보니 내가 품을 수 있는 세상이, 생각할 수 있는 범위가 너무 좁아진다는 것을 깨달았다. 잘 먹지 못하고, 따뜻한 물로 마음껏 샤워를 하지 못하고, 감기에 걸려서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것이 내게 힘든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더 넓은 세상을 인식하는 순간 나의 작음을 조금 더 알게 된다. 힘듦을 비교하자는 것이 아니다. 우리 모두는 각자 자신만의 전쟁을 하고 있고 자신만의 시련과 좌절이 있기에 서로를 비교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현명하지 않다. 다만 개인의 삶으로부터 고개를 들어 세상을 바라보기 시작하면 나라는 존재가 얼마나 작은지, 해서 내가 겪는 시련과 어려움 또한 비교적 얼마나 작은지에 대해 생각할 수 있다. 캐나다 대자연 속에서 열흘 남짓 생활하면서 그 누구도 내게 내가 겪고 있는 일로 인해 힘들어하지 말라고 말한 적이 없다. 아무도 내가 어떤 어려움을 겪고 있었는지 몰랐기에. 하지만 그 누구의 위로도 필요치 않았던 건 나 스스로가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에 대한 깨달았기 때문에 나는 힘든 상황 속에서도 힘들어하지 않을 수 있었다. 힘든 마음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힘들게 하는 요소가, 또 내가, 이 세상에서 얼마나 작은 부분인지를 알았기에 힘들지만 동시에 힘들지 않을 수 있었다.

어쩌면 지금 느끼는 약간의 불편함도 내가 느껴야 하는 것들 중 하나일 수도 있다. 알아야 할 것들을 제때 알지 못하고 느껴야할 것들을 온전히 느끼지 못하면 성장할 수 있는 만큼 성장하지 못하기에 나는 다시금 마음을 다잡고 조금 불편하게 살자고 스스로에게 말한다. 감사할 거리가 없어보이는 상황에서 감사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면 감사하자고 다짐한다. 거부하고 싶은 마음을 꿀꺽 삼켜야 한다면, 알약을 힘겹게 삼키듯 그렇게 삼켜야 한다면 나는 삼키겠다. 비록 자꾸만 변덕을 부리는 나지만 만약 변덕을 안 부리는 방법을 터득하는 중에 변덕을 계속 부려야하고, 그에 대해 내 자신에게 계속 실망을 해야한다면 기꺼이 그렇게 변덕을 부리며, 실망하며, 변덕을 줄여 나가겠다.

결국에 난 이 삶을, 이 세상을 최선을 다해 살아내겠다.

조바심이 나는 나에게

마음만 가지고는 안된다는 걸 최근에 깨달았다.  아무리 마음이 굴뚝 같아도, 진심이 타오를 것 같아도 그 열망을 행동으로 옮기지 않으면, 잘 갈고 닦은 실력으로 끌어 모으지 않으면, 그건 그저 잠깐의 감정에 불과하다고. 감정을 폄하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계획과 실천에 차이가 있듯이 마찬가지로 감정과 열정에도 확연한 차이가 있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것 뿐이다. 분명 감정만으로는 세상도, 나도 바꿀 수가 없다. 무언가를 바꾸려면, 영향력을 키우려면, 마음만 앞서서는 충분하지 않다. 실력이 필요하다.  훈련이 필요하고 그릇을 넓히는 과정을 겪어야 한다. 광야를 겪어야만 높이 올라갔을 때에 허무하게 추락하지 않을 수 있다. Be patient, Grace.

 

그리고 또

나는 고생을 하면 안된다고 생각하면 안된다. 여태까지 무의식 중에 나라는 사람은 인생에서 꽃길만 걸어야 한다고, 평범한 삶을 살고 싶지 않다는 열망으로 시야가 좁아져 그렇게 굳게 믿고 있었다. 내게 고생은 먼 얘기라고. 그래서 그렇게 칭얼댔던 것 같다. 결정을 내려놓고서도 그 결정에 따르는 결과가 부당하다고 생각했던 것도, 나의 기대에 부흥하지 못했기 때문에 현실을 옳지 않다고 판단했던 것도, 그리고 이 상황이 억울하기만 하다고 느꼈던 마음도 모두 이 무의식적인 교만함 때문에 생긴 감정들이다. 나는 특별한 삶을 살아야 하니까, 이런 평범한 어려움 따위는 겪지 말아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분명히 옳은 결정을 내렸는데 왜 결과는 피폐한 삶일까? 나는 여태까지 늘 행복했었는데 옳은 결정을 내린 지금은 왜 행복하지 않지? 이건 무언가 맞지 않아. 나는 행복해야 한다구. 이전에 그랬던 것처럼, 앞으로도 행복해야 하는 나야.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며 내가 내린 결정에 대한 보답이 없는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고, 때문에 나는 억울하고 부당하다고 느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나의 질문 자체가 오답이었다. 옳은 결정은 늘 풍성함을 가져다주지 않을 뿐더러 내가 현재 처한 상황에서의 옳은 결정은 피폐한 삶을 초래하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나는 옳은 결정을 내렸기 때문에 삶이 피폐했던 것이다. 무언가 맞아도 아주 맞았던 것이다. 부족하지만 십자가의 길을 택했기 때문에 힘들었던 것이고, 나름 좁은 문을 통과하려고 애썼기 때문에 자꾸 마음이 어려웠던 것이다. 만약 쉬운 길, 넓은 길을 택했더라면 분명 지금처럼 행복하지 않다고 느끼진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신앙은 행복에 대한 것이 아니다. 크리스챤으로 산다는 것에서 행복은 최종 목적이 아니다. 신앙생활에서의 주인공은 누가 뭐래도 하나님이고, 예수님을 따라간다는 것은 말 그래도 하나님의 영에 이끌려 삶을 의미한다. 내가 원하는 것들, 내가 이루고 싶은 것들, 그리고 나의 행복을 원하는 자아가 촛점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과 그 분의 나라가 임하는 것이 촛점이다. 그렇기에 크리스챤, 즉 작은 예수가 된다는 것은 어마무시한 일이다. 예수님을 믿기로 결정하는 동시에 스스로의 자아를 부인하고 뼛속까지 박혀있는 죄성– 죄로 쩔어있는 자기 자신–과 싸우는 전쟁의 시작이다. 어떤 목사님의 말에 의하면, 예수님을 믿는다는 건 자기 자신에게 사형선고를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한다. 사형선고를 받은 죄수가 행복한지 여부를 그 어느 누가 최종 목적으로 삼는단 말인가? 이렇듯 개인의 행복은 신앙생활에서 포인트가 아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행복은 분명 최종 목적과 함께 온다. 그것도 그냥 일상생활에서 느끼는 행복이 아니라 하늘에서 내려오는 진정한 행복. 상황과 환경에 제한되지 않는 그 행복이 하나님을 닮아가고 하나님의 나라의 임하심을 사모함에 있다. 복음은 참으로 역설적이고, 논리를 뛰어넘는다는 것을 다시금 느낀다. 행복을 추구하진 않지만 결국엔 그 무엇보다 큰 기쁨을 누릴 수 있다. 스스로를 부인하지만 결국 진정한 자아를 찾게 되기 마련이다. 지으신 그대도 회복시키시기 위해서는 현재의 죄에 찌들린 모습을 버려야만 한다. 져야만 이기는 예수님의 섭리다.

그렇기에 내가 선택한 나름의 좁은 길도 당연히 어려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더 예수님을 닮아가고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사랑스러운 영혼이 되려면 옳은 선택 뒤에 따르는 훈련을 받아야 한다. 지름길은 없다. 더 쉬운 길도 없다. 이전처럼 계속 행복하게 지내야만 한다는 건 나의 착각이었다. 하지만 첩첩산중에 놓여있을지라도 그곳을 지나갈 수 있는 힘을 성실히, 꾸준히 공급해주시는 이가 있기에 어려움을 뚫고 지나갈 수 있는 것이다. 광야를 피하게 해달라는 기도보다는 인고의 시간을 잘 버텨내 광야를 무사히 통과할 수 있도록 그 분의 인도하심과 도우심을 구하는 기도가 더 성숙한 믿음의 기도임이 틀림없다. 광야에 놓인 이상, 전진이 없다면 제자리에 가만히 서있는 것도 후퇴이기에– 믿음은 성장이 없으면 소멸할 수밖에 없다– 계속 앞으로 나아가는 것밖에는 방도가 없다.  앞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죽고, 앞으로 나아가려면 힘이 필요하다. 그래서 도우심을 구하는 것이다.

솔직성히 이것을 깨달은 지금도 나는 잘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만한 결정을 내리긴 내렸지만 그 결정에 대한 책임을 충실히 지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 아쉽고 또 면목이 없다. 작은 시련 앞에서도 그렇게 툴툴대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던 내 모습을 돌아보면 얼마나 철없고 생각이 짧았는지. 또다시 나의 무지와 작음을 깨닫는다. 감사한 것은 오늘 내가 던지는 질문은 ‘왜 나는 이전처럼 행복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은가?’에서 ‘그리고 또 무엇을 할 수 있을까?’로 바뀌었다는 점이다. 옳은 선택에 따르는 광야의 길을 어차피 걸어야 한다면 몸을 사리지 않고 힘껏 뛰겠다. 내게 주어진 인고의 시간 중 이리저리 조금이라도 더 성장할 수 있도록 궁리하겠다. 나의 모난 모서리들이 다듬어지기 위해 더 적극적으로 배우고, 말씀을 읽고, 기도를 하며 하나님의 목소리를 경청하겠다. 그래서 광야의 끝에 다다를 때면 하나님의 안테나와 나의 안테나가 맞닿을 수 있도록. 나의 삶에서 예수님의 향기가 더 진하게 나도록. 하나님의 작은 속삭임에도 즉각적으로 반응할 수 있는 영적인 민감함을 가질 수 있도록. 말씀을 나의 삶에 유일한 지표로 삼을 수 있도록.

그리고 또 무엇을 할 수 있을까?